민속동요
옛날의 동요는 한 지역의 영향력 있는 시조 문필가가 즉흥적으로 말을 지어 읊으면 그것이 전수되어 사람들의 귀와 입을 통해 전달되어 널리 펴져 나갔으며 대부분의 전래동요가 성인이나 어린이가 공통적으로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전래동요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문헌상으로 보면 상고시대의 '구지가'란 작품에서 시작되어 삼국시대 향가인 '서동요'를 비롯 하여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게 되면서 불교,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창가시대
서양 음악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찬송가의 보급으로 시작되었으며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면서 찬송가가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찬송가는 교회나 학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사이에 파고 들었으며 찬송가 멜로디에 우국충정의 가사를 담은 애국의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창가는 기독교의 찬송가가 모체가 되어 일본의 창가와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창작동요의 탄생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이 제정되면서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오늘날의 세미나에 해당하는 <전 조선 소년지도자 대회>가 색동회 주최로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어린이 창작 동요의 필요성이 '윤극영'에 의해 제창되었고 1924년 윤극영이 주축이 된 최초의 노래단체인 <달리아회>가 조직되었다고 합니다. 이무렵 '반달'을 비롯한 주옥같은 동요들이 나오기 시작하였으나 우리 동요와 애국창가는 일제에 의해 금지곡으로 취급되어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교사와 학생들이 처벌받기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동요의 전성시대
1930년대에 들어 동요집들이 출간되고 동요를 곁들인 동극이 개발되면서 동요는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유치원인 이화유치원을 설립한 미국여성 브라운이 1930년 손동작과 몸동작을 한데 엮은 <유희창가집>을 펴내면서 미국 유아 동요가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윤석중을 비롯한 윤극영, 홍난파, 박태준, 정순철 등 동요작사가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밖에 방정환이 주관한 <어린이>잡지 이외에도 <신소년>, <아이 생활>등을 통하여 동요와 동시가 많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주일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이 성가대 활동에서 찬송가 이외에도 우리 동요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일제하에서 우리 동요의 보급은 주일학교가 큰 역할을 하였고, 기독교 출신의 문인과 음악인이 많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동요의 암흑기
1940년대에 들어서 일제는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고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일본어만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시기에 많은 예술인들이 붓을 던지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섰고, 저명한 예술가에게는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일본어, 일본노래만을 부르게 되니 우리의 동요는 지하로 숨어버리고 그야말로 암흑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의 동요
일본어와 일본노래에 익숙해진 어린이들을 위해 새노래들이 많이 만들어 졌습니다. 민주주의의 이념에 입각한 새나라 건설과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새로운 나라의 역동적인 분위기가 번져 나갔으며 이러한 분위기에서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동요의 보급이 시작되었습니다. 생동감 있고 약동적인 감각의 새로운 동요가 속속 발표되었으며 동요의 순수성과 예술성이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의 음악교육 시간을 통해 동요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동요의 내용 역시 다양해지기 시작합니다. 해방 직후 동요 창작활동의 중심지는 서울YMCA의 소년부였습니다. 서울YMCA는 <어린이 노래모음>이라는 동요곡집을 발행하였으며 주로 외국곡을 번안하였다고 하는데요. 매월 서울YMCA 어린이 잔치가 개최되어 새로운 동요가 계속 발표되었고 동요단체와 초등학교 합창단이 새로운 감각으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YMCA가 주축이 된 어린이 잔치는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라디오로 전국에 중계하였다고도 합니다. 또한 1947년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어린이 잔치에서 소개되어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전시동요
6.25가 터지고 우리 겨레는 또 한번의 어려움울 맞게 됩니다. 강제적으로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 했으며 서울 수복 직후에는 멸공을 노래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권길상이란 분은 수복 직후 <어린이 음악대>를 재편성하여 활약하다가 1.4후퇴를 맞이하여 부산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해군LST함정을 이용하여 <해군어린이 음악대>라고 이름 짓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전시동요 보급에 노력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군 어린이 음악대를 자주 부산 경무대에 초청하여 외국 사절들에게 한국의 어린이 합창단 활동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순회공연을 실시하여 한국 어린이들의 합창실력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음악인들은 대부분 군 기관에 소속되어 각기 전시 예술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의 전시 동요들은 전의를 북돋우고 승전에의 의지를 나타내는 데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합니다.
1950년대의 동요
전쟁으로 피폐해진 어린이들의 마음을 순화하기 위한 노력들이 아동문학가, 작곡가, 교육자를 중심으로 일어나면서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새로운 동요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먼저KBS의 '방송동요'에서 소개되기 시작했는데요.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봄비, 파란마음 하얀마음, 고향 땅, 초록바다 등 오늘날의 주옥 같은 동요가 이 무렵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는 창작의 질과 양이 모두 풍요로운 시기였으며 이러한 추세는 1960년대까지로 이어지게 됩니다.
1960년 대의 동요
1960년대 초에 상업 방송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각기 특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편성해 나가기 시작했는데요. 이 무렵부터 CM송이 등장하면서 쉴새 없이 반복되는 멜로디에 어린이들의 관심이 쏠리게 되었습니다. 가요식 멜로디와 CM송의 영향으로 동요보급 운동은 한차례 어려움을 맞게 되었습니다.
1970년 대의 동요
상업주의 영향 속에서 순수 동요의 가치를 찾아가자는 인식이 관계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동요에 대한 보호의식 또한 70년대 후반기부터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국립 교향악단이 동요를 교향악단의 연주와 접목시킨 '동요접속곡'을 매번 연주하기 시작하여 8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기존 동요의 인식이 교향악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 현재의 동요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미 어린이 음악회>가 열리고 서울 시립 소년소녀 합창단이 미국 순회연주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MBC에서 1983년부터 <창작동요제>를 열게 되면서, 어린이 음악을 일선에서 직접 지도하는 초등학교 교사의 역량이 세상에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1984년, 삼성전자는 서울YMCA, 동아일보와 함께 <가족동요 창작 경연대회>를 전국적인 규모로 펼쳐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동요부르기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서울에서 한성균이란 분이 매주 일요일 낮 동방 플라자에서 가족단위의 노래지도를 담당하여 동요가족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80~90년대를 지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요의 곡조와 성향은 더욱더 다양해지고 그 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